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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극단으로 내모는 ‘가족의 파괴’
시사INLive | 변진경 기자 | 입력 2011.12.14 09:47
회원 수 20만명을 넘는 한 인터넷 교육 정보 커뮤니티에서 중1 여학생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고 싶다는 어머니가 고민을 토로했다. "서울대 갈 아이라고 소문난 아이인데, 중간고사에서 전교 1, 2등이 아니라 반에서 3등을 했어요. 전 너무 속상한데 아이는 무덤덤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감과 위로 댓글이 이어졌다. "제 아들도 그래요. 반에서 1등 하던 놈이 2등 하면 자극을 받아야 하는데 2등도 잘한 거라네요. 전교 석차는 어쩌라고요. ㅠㅠ." 이 커뮤니티에서 가장 호응이 좋은 글은 "우리 아이가 전교 1등을 했다"라거나 "드디어 외고(과고)에 합격했다"라는 소식을 전하는 글이다. 이런 글에는 "축하하고 존경한다"라는 또래 학부모들의 댓글이 100여 개씩 달린다.
아이들도 성적 때문에 애를 끓인다. 중학교 3학년생 강민석군(가명)은 부모님에게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게 강아지를 가르쳐도 너보다는 나을 거다"와 같은 소리를 자주 듣는다. 강군은 그럴 때마다 "죽이고 싶고, 자살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전교 410명 중에서 160등 하고 반에서 36명 중에 14등 하는데 이게 그렇게 바닥인가요?" 고등학교 1학년생 송희재군(가명)은 명문대를 나온 아버지에게 "친구나 재능 같은 건 다 때려치우고 반에서 10등 하는 성적이나 올려라" 하는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송군은 "예전에는 하루하루 힘들었는데, 요즘은 무감각하다.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이 그리울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1등을 원하는 부모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녀. 지난 3월 서울의 한 고3 학생이 '전국 1등'을 강요해온 어머니를 살해한 것처럼, 학업 스트레스의 칼끝은 학생 당사자는 물론 그 부모, 전 가족을 향한다. 자녀가 부모와 학업으로 인한 갈등을 겪다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1년 전에도 대구의 한 중학생이 학기 말 성적표가 나오는 날 집에서 꾸중 들을 것이 두려워 이웃 어느 가정집에 몰래 숨어 있다가 그 집 주부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9년 경기 수원에서 한 대학생(21세)은 성적표를 보고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를 살해한 뒤 4개월간 안방에 시신을 방치했고, 지난해에는 서울의 한 중학생이 '판검사가 되라'는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아이들은 지금 폭발 직전이다. 여러 통계 수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통계청의 < 2011년 청소년 통계 > 에 따르면 2010년 15~24세 청소년 10명 중 7명이 "가정·학교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라고 답했다.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청소년이 최근 5년 사이 15.3% 늘었고(201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 살인·강도·강간·방화와 같은 청소년 강력 범죄는 2년 사이 48% 증가했다(2011년 경찰청 자료). 청소년 사망 원인 1순위는 '운수 사고'에서 2008년부터 '자살'로 바뀌었다.
부모는 정작 학업 스트레스 주지 않지만…
무엇이 청소년을 힘들게 하는 걸까? 지난해 서울시 소아청소년 광역정신센터가 서울 시내 중·고교생 3만786명을 대상으로 벌인 '우울증 학생 선별검사'에서 17.2%가 평소 우울함을 느낀다고 답했는데, 이들이 가장 많이 꼽은 우울의 원인은 '공부'였다. "지난 1년간 한 번이라도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라고 답한 15~24세 청소년(전체의 8.8%)이 든 가장 큰 자살 충동 이유도 '성적 문제'였다(2011 청소년 통계). 국제적으로 비교해도 한국 청소년이 받는 학업 스트레스는 평균 이상이다. 한국은 "공부 문제로 스트레스를 느낀다"라는 청소년의 비율이 일본·미국·중국보다 각각 28%, 18%, 13% 높았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아이들이 말하는 '학업 스트레스'는 다른 말로 '부모님과의 스트레스'를 뜻한다. 단순히 성적이 낮은 것보다 그로 인한 부모와의 불화 때문에 더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부모와 갈등을 겪는 원인으로 '학업 성적'을 가장 많이 꼽았다는 것(여성가족부, < 2009년 청소년 유해환경 접촉 실태조사 > )이 이를 뒷받침한다. 서울 마포구의 한 학교에서 학교 동기나 선후배를 상담해주는 '또래 상담사'로 활동한 이선미양(15·가명)은 "중간·기말 고사가 끝나고 성적표가 나올 즈음 학생들에게 상담 요청이 엄청나게 쏟아지는데, 대부분 낮은 점수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이 실망하고 야단칠까봐 무섭다는 이유로 걱정을 한다. 특히 부모님이 특목고 진학을 강요하는 중3 선배들의 경우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다"라고 말했다.
부모가 스스로 학업 압박을 주지 않는다고 자신해도 자녀는 훨씬 민감하게 느낀다. 학술 논문 < 자녀의 성적이 어머니와 자녀의 교환관계와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 > (한국청소년연구 제21호, 김현주 외, 2010년)에 따르면, 자녀의 성적은 부모들이 느끼는 (자녀와의) 관계 만족도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자녀들이 느끼는 (부모와의) 갈등·관계 만족도에는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심상담심리센터 김미자 소장은 "상담하다 보면 정작 부모는 드러나게 학업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데도 아이 스스로가 경쟁적 사회 분위기 혹은 '부모님이 요구하지는 않지만 아마 내가 잘해야만 인정을 해주실 거야'라는 심리적 부담으로 우울해하고 무기력해진 사례가 종종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한 '학업 스트레스'가 아이들 마음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숭실대 박지인씨의 석사학위 논문 < 입시 스트레스가 고등학생의 자살 충동에 미치는 영향 > (2008년)은 "입시 스트레스가 높으면 자살 충동도 높을 것이다"라는 일반 통념과 달리, 입시 스트레스와 자살 충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벽한 인과관계를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가족 기능'이라는 변수 때문이다. 입시 스트레스가 높은 경우라도 서로를 잘 보듬어주는 가족 기능이 원활히 작동한 경우에는 수험생의 자살 충동이 현저히 떨어졌다. "공부 압력이 자녀의 비행이나 공격성 증가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부모-자녀 간 신뢰가 높은 경우에는 그 인과관계가 무의미해진다"라는 학술 논문 < 부모-자녀 관계와 공부 압력이 청소년 자녀의 심리사회적 문제 성향에 미치는 영향 > (한국아동복지학 제6호, 박현선, 1998년)의 결론과도 일치한다.
결국은 가족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이번 고3 모친 살해 사건과 같은 청소년 패륜 범죄가 '입시 중심 사회'의 문제이기 이전에 '가족 파괴' 문제에서 빚어진 비극이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부모가 함께 아이를 돌보았다면, 그래서 과도하게 아이와 아이 성적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자녀 간의 관계를 중재하고 가정을 보호할 사람이 있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학업 문제는 하나의 매개가 됐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김미자 소장도 "아이가 가정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배우지 못했을 때 학업 문제와 같은 갈등 상황에 부딪히면 자신 혹은 상대방에게 폭력적인 선택을 하기 쉽다"라고 말했다.
청소년이 원하는 건 '가정의 화목과 건강'
학업으로 인해 자녀들과 갈등을 겪는 부모에게 김 소장은 "부모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주문한다. 공부를 잘해야만 행복한 삶을 사는지, 본인은 정작 무엇에서 행복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자라왔고 무엇이 결핍되거나 넘쳤는지, 그것이 내 결핍과 넘침을 혹시 아이에게 투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상담 과정에서 부모를 보면 본인이 학벌이 좋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아이에게 학업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학업 스트레스의 정점에 선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행복한가?"라고 물었다( < 2009년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실태조사 > ). 학생 45%만이 "행복하다"라고 답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역시 '학업 부담 때문'이 1위(41.1%)를 차지했다. 이어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의외로 1위는 '높은 성적'이나 '학력·학벌'이 아니었다. 정작 고3이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가정의 화목과 가족의 건강(56.0%)'이었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
아이들도 성적 때문에 애를 끓인다. 중학교 3학년생 강민석군(가명)은 부모님에게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게 강아지를 가르쳐도 너보다는 나을 거다"와 같은 소리를 자주 듣는다. 강군은 그럴 때마다 "죽이고 싶고, 자살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전교 410명 중에서 160등 하고 반에서 36명 중에 14등 하는데 이게 그렇게 바닥인가요?" 고등학교 1학년생 송희재군(가명)은 명문대를 나온 아버지에게 "친구나 재능 같은 건 다 때려치우고 반에서 10등 하는 성적이나 올려라" 하는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송군은 "예전에는 하루하루 힘들었는데, 요즘은 무감각하다.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이 그리울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
아이들은 지금 폭발 직전이다. 여러 통계 수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통계청의 < 2011년 청소년 통계 > 에 따르면 2010년 15~24세 청소년 10명 중 7명이 "가정·학교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라고 답했다.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청소년이 최근 5년 사이 15.3% 늘었고(201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 살인·강도·강간·방화와 같은 청소년 강력 범죄는 2년 사이 48% 증가했다(2011년 경찰청 자료). 청소년 사망 원인 1순위는 '운수 사고'에서 2008년부터 '자살'로 바뀌었다.
부모는 정작 학업 스트레스 주지 않지만…
무엇이 청소년을 힘들게 하는 걸까? 지난해 서울시 소아청소년 광역정신센터가 서울 시내 중·고교생 3만786명을 대상으로 벌인 '우울증 학생 선별검사'에서 17.2%가 평소 우울함을 느낀다고 답했는데, 이들이 가장 많이 꼽은 우울의 원인은 '공부'였다. "지난 1년간 한 번이라도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라고 답한 15~24세 청소년(전체의 8.8%)이 든 가장 큰 자살 충동 이유도 '성적 문제'였다(2011 청소년 통계). 국제적으로 비교해도 한국 청소년이 받는 학업 스트레스는 평균 이상이다. 한국은 "공부 문제로 스트레스를 느낀다"라는 청소년의 비율이 일본·미국·중국보다 각각 28%, 18%, 13% 높았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아이들이 말하는 '학업 스트레스'는 다른 말로 '부모님과의 스트레스'를 뜻한다. 단순히 성적이 낮은 것보다 그로 인한 부모와의 불화 때문에 더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부모와 갈등을 겪는 원인으로 '학업 성적'을 가장 많이 꼽았다는 것(여성가족부, < 2009년 청소년 유해환경 접촉 실태조사 > )이 이를 뒷받침한다. 서울 마포구의 한 학교에서 학교 동기나 선후배를 상담해주는 '또래 상담사'로 활동한 이선미양(15·가명)은 "중간·기말 고사가 끝나고 성적표가 나올 즈음 학생들에게 상담 요청이 엄청나게 쏟아지는데, 대부분 낮은 점수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이 실망하고 야단칠까봐 무섭다는 이유로 걱정을 한다. 특히 부모님이 특목고 진학을 강요하는 중3 선배들의 경우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한 '학업 스트레스'가 아이들 마음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숭실대 박지인씨의 석사학위 논문 < 입시 스트레스가 고등학생의 자살 충동에 미치는 영향 > (2008년)은 "입시 스트레스가 높으면 자살 충동도 높을 것이다"라는 일반 통념과 달리, 입시 스트레스와 자살 충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벽한 인과관계를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가족 기능'이라는 변수 때문이다. 입시 스트레스가 높은 경우라도 서로를 잘 보듬어주는 가족 기능이 원활히 작동한 경우에는 수험생의 자살 충동이 현저히 떨어졌다. "공부 압력이 자녀의 비행이나 공격성 증가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부모-자녀 간 신뢰가 높은 경우에는 그 인과관계가 무의미해진다"라는 학술 논문 < 부모-자녀 관계와 공부 압력이 청소년 자녀의 심리사회적 문제 성향에 미치는 영향 > (한국아동복지학 제6호, 박현선, 1998년)의 결론과도 일치한다.
결국은 가족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이번 고3 모친 살해 사건과 같은 청소년 패륜 범죄가 '입시 중심 사회'의 문제이기 이전에 '가족 파괴' 문제에서 빚어진 비극이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부모가 함께 아이를 돌보았다면, 그래서 과도하게 아이와 아이 성적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자녀 간의 관계를 중재하고 가정을 보호할 사람이 있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학업 문제는 하나의 매개가 됐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김미자 소장도 "아이가 가정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배우지 못했을 때 학업 문제와 같은 갈등 상황에 부딪히면 자신 혹은 상대방에게 폭력적인 선택을 하기 쉽다"라고 말했다.
청소년이 원하는 건 '가정의 화목과 건강'
학업으로 인해 자녀들과 갈등을 겪는 부모에게 김 소장은 "부모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주문한다. 공부를 잘해야만 행복한 삶을 사는지, 본인은 정작 무엇에서 행복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자라왔고 무엇이 결핍되거나 넘쳤는지, 그것이 내 결핍과 넘침을 혹시 아이에게 투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상담 과정에서 부모를 보면 본인이 학벌이 좋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아이에게 학업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학업 스트레스의 정점에 선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행복한가?"라고 물었다( < 2009년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실태조사 > ). 학생 45%만이 "행복하다"라고 답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역시 '학업 부담 때문'이 1위(41.1%)를 차지했다. 이어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의외로 1위는 '높은 성적'이나 '학력·학벌'이 아니었다. 정작 고3이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가정의 화목과 가족의 건강(56.0%)'이었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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